평양 그리 멀지않습니다. 그러나... (이글은 지난2007년 평양방문후 기독교보에 수록된것입니다)
828호 829호(기독교보2회 연재)
평양,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 우 성(마산 YMCA이사장)
필자는 한민족복지재단의 일원으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의 초청으로 지난해(2007) 12월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평소 나름대로 북한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방북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방북 팀100여 명은 12월11일 김포국제공항에 대기되어 있던 북측 고려항공에 탑승하였습니다. 북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북한 승무원들의 평양억양의 목소리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이륙 후 560Km를 비행하여 평양 순안공항에 정확히 1시간 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불과1시간 비행하면 도착하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나는 가깝고도 먼 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평양 유일의 공항이라고 하는 순안공항은 우리 일행을 수행한 20여명과 공항 직원 외에는 다른 승객들을 찾아 볼 수 없는 한산한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방문단은 간단한 가방검사와 소지하고 있던 휴대폰만 보관 장소에 맡긴 후 입국절차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어느 다른 나라보다 간단한 입국 절차였습니다. 그동안 한민족복지재단이 북측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가를 확인하는 일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한 시간 거리의 가깝고도 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우리 방문단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분산 탑승하여 평양 여행길을 시작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넓은 들판, 도로변에 곧게 솟은 버드나무, 간간히 지나가는 우리의 동포들 모두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항공기에 함께 탑승했던 민화협 소속직원 3명과 당에서 파견된 1명의 간단한 안내를 받고, 40분가량 이동하여 도착한곳은 평양 원형식당이라고 하는 유명한 식당이었습니다. 이곳에서우리는 단고기로 불리는 북한의 음식을 처음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식사 중 특이했던 것은 단고기가 부위별로 차례로 나오는 것과 철저히 1인분으로 나누어 공급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푸짐한 점심식사 후 보통강변에 위치한 보통강호텔에 여장을 푼 후 곧이어 일정에 맞추어 김일성 주석의 고향이며 그가 자랐던 만경대의 유적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곳 안내원의 현란한 언변과 설명에 모두 혀를 내둘렀습니다. 유적의 모두는 김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찬양 내용이었습니다. 모든 슬로건과 구호의 내용은 기술 할 수 없는 내용들로 되어있었습니다. 이어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인 강반석 권사가 출석했던 칠골교회 방문하였습니다. 그토록 참여해 보고 싶었던 북한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 칠골교회의 황민우 담임목사의 환영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어렴풋이 느꼈으나 봉수교회의담임목사의 인사말에는 성경적인 믿음의 표현보다는 북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한 표현에 모두가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방북단 모두는 북한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며 남측대표단의 책임자인 김형석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해는 이미지고 어두워 졌는데 예배당 입구며 화장실에 전등 하나 없어 모두가 어려움을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처음 맞는 북한의 밤은 우리 모두를 설레게 했습니다. 시내중심을 포함해서 도로변에는 가로등이 없고 군데군데 보이는 아파트 불빛은 너무 희미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보통강호텔에서 북측 민화협 주관 저녁만찬이 시작되었는데 이 만찬은 식사 감사기도 후 풍성한 한정식으로 대접을 받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2시간의 만찬을 마치게 되었고, 밤 10시경이 되어서 우리는 호텔에 입실하여 좋은 시설의 방에서 북한의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칠골교회에서의 예배
둘째 날 일정이 시작되는 아침 방북단은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나왔습니다. 호텔주변 보통강변을 지나는 차창 밖으로 우리는 얼음이 꽁꽁 얼은 추운 겨울아침에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첫코스로 김일성 주석 기념비인 만수대를 방문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동상 앞에 의무적으로 참배케 했다고 하나 사전에 우리 측 입장이 충분히 전달되어 우리 모두는 참배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김일성 주석 기념비는 참으로 웅장하고 거대한 동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곳이 더 큰 의미를 가져다 준 것은 이동상이 서있는 위치가 평양에서 선교하던 선교사관의 자리였다고 하니 더없이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 우리는 그들이 인민들의 재교육장이라고 자랑하는 인민 대학습당을 방문하였습니다. 학습장은 1982년에 건립되었고 약 일만 평의 대지위에 많은 장서를 구비하고 인민들에게 교육학습장으로 활용한다는 안내원들의 적극적인 설명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주석을 우리에게 자랑 하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음 방문지는 대동강 쑥 섬에 위치한 통일전선 탑이었습니다. 안내자의 말로는 이곳은1990년에 제막된 56개 정당 및 사회단체대표 695명이 참여하여 통일을 논의하였던 장소로 설명 하였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은 장황하였는데 그 설명의 결론은 주석의 영도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방문이 우리 방문단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이 지역에서 자라난 방북단원 중 최고령자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대동 강변에 내리지도 못한 채 순교 당했던 장소가 바로 이 곳”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어 우리는 주체사상탑을 가보게 되었는데 주체탑은 195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탑은 탑 높이가 175m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 탑 위에 세워진 20m높이의 동상으로 된 주석의 사상 탑은 그들의 정신적인 성물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이어 우리 방북단은 평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순안농장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을 어귀에 어마어마한 바위에 새겨진 주석의 찬양가는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농장의 규모는 1450정보였고, 약 430만평의 농지에 농사하는 이곳에 우리 측 농업기술대학에서 농법의 전수와 한국기독실업인회에서 지원한 농기계의 보급을 통하여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감사의 인사말을 북측대표를 통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농기계의 시연과 그들이 직접 재배한 고구마를 맛보는 오붓한 시간을 가진 후 평양으로 돌아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양곡예단의 공연을 북측학생 및 주민 약 3000명과 같이 관람하였습니다. 저녁식사는 북한 가수들의 노래와 공연을 관람하면서 불고기로 맛있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열악한 생활환경들
셋째 날 일정은 예정에 없었던 묘향산 관광을 위하여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였습니다. 흐리고 안개가 자욱한 날씨 가운데 우리의 국도보다도 못한, 그들이 말하는 소위 고속도로를 주행하며 차창 밖으로 들녘과 산, 맑은 강, 마을 등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1시간 가량 주행 후 들린 휴게소는 노천 야외휴게소이었습니다.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각자의 형편에 따라 적당히 볼일을 보며 여성들은 인해전술로 볼일을 보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텔 출발 후 향산갑문을 통과하여 묘향산까지는 2시간 20분 거리였습니다. 그곳을 지나 우리는 그들이 자랑하는 3대 명산 중 한 곳인 묘향산 입구에 웅장하게 세워진 ‘국제 친선 전람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은 세계 179개국의 지도자들이 선물한 221,411점의 진귀한 물품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영도자 김 주석의 탁월한 리더십이 전 세계가 인정하고 선물을 보내 왔노라”며 주석을 침이 마르게 칭송하였습니다.
진열된 물품 하나하나는 과히 장관이었으며 감탄할만한 진귀한 물품들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박물관보다 진귀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서방세계 인사로부터 받은 것은 1992년 북한을 방문한 미국의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의 물품이 유일한 것이었고, 대부분은 동남아,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전람관 방문 후 우리 방문단은 묘향산 중턱계곡에서 바라보는 묘향산의 절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묘향산 절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향산호텔 대연회장에서 잘 차려진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 북측의 공식사찰 중 유명한 한 곳인 보현사를 방문하였습니다. 보현사는 당대의 유명한 승려 사명대사가 칩거하며 수도한 곳으로 불자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었습니다. 보현사 방문을 마치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이날 저녁만찬은 우리 측에서 주최하는 공식만찬을 가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표목사님 만찬기도 후 북측의 초청인사가 입장하였는데, 기도 전 입장하는 것은 기독교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오붓한 식탁에서 서로 허물없는 대화의 꽃을 피우고 셋째 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상호왕래 활성화돼야
방북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우리 방북단은 아침 일찍 고신교단과 한민족복지재단에서 지원하는 평양 빵공장을 방문하였습니다. 2개 라인에서 1일 생산량 15,000개를 생산하여 어린이들에게 급식용으로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막 구어낸 빵을 맛보았고, 기념으로 몇 개씩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은 본 재단에서 후원하는 평양의과대학병원을 방문하였습니다. 1948년에 개원된 이 병원은 14,000여 평 대지 위에 세워진 오래된 병원이었습니다. 진료 중이어서 많은 곳을 볼 수는 없었지만 혈액투석 중인 곳은 3개의 침대만 있는 것으로 보아 시설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병원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명한 쌍둥이 빌딩 고려호텔을 전경으로 기념 촬영 후 평양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공항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승객이 없는 한산한 모습이었습니다. 간단한 출국심사를 마친 후 우리를 기다리는 고려항공기에 몸을 싣고 기체는 다시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기내에서 배부되는 로동신문의 기사는 우리나라 선거판의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주체사상 일색으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이륙 한 시간 후 서울국제공항에 도착하여 3박 4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3박 4일의 평양을 일정을 마무리 하며 느끼는 감정은 정말 평양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지만 그리 멀지 않은 그곳이 나에게는 왜 이리 이질적으로 느껴지는지!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북한은 우리와 동일한 한민족이면서도 또 다른 세계로 비춰지는 것일까?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질까? 사상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할까? 어렵게 사는 내 동포는 어떻게 포용하며 접근해야할까? 등 많은 질문을 가져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번 방북의 소고(小考)를 마치면서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북한을 가슴으로 안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끊임없이 북한과 왕래하고 그들을 지원하며 그들의 경제를 살리면서 그들이 서방세계로 나오게 하는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평양은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끝)